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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량별

Essay by. 설영 님 (@seolyoung53)

세부 페이지(13) 이미지

* 사망 소재가 있음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은 아이유의 노래 ‘에잇(Eight)’을 모티브로 서술하였으며 가사를 일부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함께 들어주셔도 좋은 노래입니다.

 

 

옅은 안개비가 오는 날이면, 하카제 카오루는 항상 같은 돌바닥 길을 걸어 해안가로 간다.

먹구름 가득 낀 하늘의 회색빛보다도 더 어두운 색의 얼굴을 하고, 언젠가 아주 어릴 때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 나갔던 기억이 생생한 그 바다로 간다.

상냥하게 저를 언제나 반겨 주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차게 때리고, 아슬아슬하게 신발 밑창까지 닿아 오는 바닷물을 찰박찰박 밟으며 저 멀리 지는 해가 바다와 만나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화아악 불어오는 바람에 안기듯 기대어 눈을 어렴풋이 찡그려 뜬다. 시끄러운 빗소리에서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제 사랑하는 애인의 목소리가. 레이 군……. 하고 불러도 닿을 수 없는 그가. 망연자실해 포기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 청바지에 스며 오는 사늘한 바닷물이 마음조차 차게 깨지게 만든다.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면 안 될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말을 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랑에 말을 건다. 견우와 직녀는 오늘- 칠월 칠석날에라도 만날 수가 있는데,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은하수보다도 먼가 보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는 그 둘이 몹시 부러워졌다.

안개 낀 하늘 속으로 손을 뻗는다. 이렇게라도 하면 레이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흩어지는 안개를 카오루는 손으로 잡아 보지만 공기는 하릴없이 빗물과 함께 샅샅이 부서진다.

 

카오루와 레이는 오래도록 서로를 좋아해 왔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감정을 깨우치는 데에, 인정하는 데에, 상대에게 제 감정을 알리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서 사귀게 된 것은 좋아하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럼에도 서로가 너무 좋아서 서로를 사랑하고 또 아껴 주는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레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 불치병이라고 한다. 눈이 퉁퉁 부어서 눈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울고 또 울고, 내가 못나서 레이 군이 병 난 것도 모르고 지켜주지도 못해 미안하다며 저 자신을 탓하고 있는데 레이는 그토록 상냥하게도 곧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력 때문인지 병은 나아지지 않고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레이는 툭하면 각혈하며 침구에 피를 뚝뚝 흘리곤 했고, 그 피를 보는 카오루의 마음은 죽죽 찢겨나가는 듯이 괴로웠다. 매일 밤 진땀을 흘리면서 거친 숨을 쌕쌕 내쉬는 레이를 품에 안고, 차라리 자신이 천벌이라도 받을 테니 사랑하는 레이를 살려 달라는 기도를 무척 간절하게 신이라는 신에게는 다 빌어 보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세상의 모든 신들은 카오루의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마지막이 점점 다가왔고, 병원에서 자신의 끝을 받아들이기는 싫다는 레이의 말에 의사도 체념하고 레이를 퇴원시켜 주었다. 퇴원한 후 레이는 카오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레이는 여느 날처럼 침대에 누운 채 카오루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는 한참을 할 말이 있는지 카오루를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헤매는 동공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냐고 물으니 곧 죽을 사람처럼 말을 한다.

카오루 군. 사랑하는 나의 카오루. 내가 죽으면, 내 몸을 태워서 그 재를 네가 가장 좋아하는 바닷가에 뿌려 줘,

 

평소 같은 말투도 아니고, 삶에 미련이 조금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희미하게 웃으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하는 말이 그런 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며, 레이 군은 내 옆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며 절망하는 울음을 터뜨리는데 레이는 한없이 웃으며 붉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는다.

카오루 군이 행복하게 살아 주면 그걸로 족해.

 

웃으며 중얼거리는 한 마디에 가슴이 천 갈래로 부서졌다. 작은 탁자에 있는 가위를 집어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주저 없이 한 움큼 잘라 카오루의 손에 쥐여 준다. 내가 죽어도, 꼭 행복해 줘.

 

레이는 그렇게 창밖으로 비가 억세게 쏟아지던 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세상을, 카오루의 곁을 떠났다. 처음 며칠은 레이가 죽었다는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레이가 살아 있다는 환각에 빠져 있었다. 기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숨을 쉬지 않는 몸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직도 피부가 부드러웠고, 입술도 붉었기에 전혀 죽은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진 제 사랑을 응시하기만 하다가 겨우 유닛 멤버들에 의해 레이는 옮겨졌다.

레이가 곁에 없으니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진짜 정신이 나갈 뻔해서 매일을 병원에서 처방받은 진통제와 진정제, 그리고 수면제로 버텼다. 당연히 몸은 망가져 갔고 반짝이는 눈빛은 점점 잃어 갔다. 레이가 없는 삶은 카오루에겐 삶이 아니었다. 카오루에게 삶을 정의할 수 있는 근원은 레이였기에 그가 없는 세상은 제게 세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살아갈 원동력 따윈 다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가 제 손에 마치 약속하듯 쥐여 주었던 살아 있는 사람의 것처럼 부드러운 어둠색 머리카락을 보면, 마치 ‘꼭 살아 줘.’라고 부탁하는 듯하던 레이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카오루는 차마 죽지도 못하고 모진 목숨을 붙들고 겨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람 같고 훈풍 같던 남자는 이제 없다. 한 사람만을 그리며 그이만의 발자욱을 따라가는 미망인이 있을 뿐이었다. 보드라운 머릿결이 푸석해지고 눈꺼풀은 한껏 쳐진 채 앙상하게 말라가는 안타까운 꼴을 보고 혹자는 말했다. 이제 그만 슬픔에서 벗어나고, 또다시 삶을 살아가라고. 하지만 카오루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이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숨통을 끊어 놓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상사병이 걸려 전해지지 않는 마음을 쏟아내며 점점 중증으로 치닫을 뿐이었다. 비가 점점 세게 오기 시작하면 그 비가 제가 우는 것 같단 마음에 심장 한구석을 베어 내듯 억지로 울어 내었다.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 대가로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을 텐데.

바닷물을 뒤적이는 손이 따끔거렸다. 틀 일이 없었던 보드라운 카오루의 손등이 다 터서 피가 배어 나오는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다.

 

‘레이 군이 항상 내 손에 자기 향이 나는 핸드크림을 발라줬었는데……. 아, 또 당신의 생각.’

 

카오루의 삶은 온통 레이였기에 어떤 생각을 꺼내 보아도 그 조각에는 항상 레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 그 끝은 레이를 그리워하는 꼴이 되었다. 그랬기에 그의 기다림에는 끝이 없었고, 기다림 속에서 허송세월하고는 하였다.

바닷물 속에서 방황하던 손이 삐죽 튀어나온 돌에 부딪혀 멈추었다. 모래와 진흙으로 덮여 있는 바닥을 카오루는 소리 없이 헤집었다. 어지럽게 찰랑거리는 흙탕물이 다시 맑아질 때까지 기다리니 물속의 작은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를 묻은 곳이었다.

카오루는 이내, 어금니로 잇몸을 깨물었음에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

 

짧은 한마디를 개탄하듯이, 한숨 쉬듯이 내뱉어 본다. 물에 비친 제 꼴이 참으로 참담하였다. 곧 그 그림자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의 파장에 묻혀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카오루는 바닷물 속으로 쓰러져 비석에 엎드려 울고 또 울었다.

 

지쳐 울음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카오루는 그곳에서 울었다. 여느 날보다도 더 레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울어서 휘청이며, 겨우 바닷물에서 일어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노을이 거의 다 지고 밤이 되고 있었다. 몹시 추운 것도 망각하고 있었는지 젖은 몸을 감싸 안고 카오루는 해안도로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또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달려 집에 도착하면, 다시 레이를 그리워하는 지옥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거기서 몇 년이라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약에 몸을 맡겨 지내야 하겠지. 다시는 당신과 함께하는 달콤한 악몽은 꾸지 못하고, 당신이 없는 끔찍한 악몽만 꾸게 되겠지.

 

차라리 여기서 죽었으면 좋겠다…….

 

“…어?”

 

석양이 져 와 그림자가 드리워진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있었다. 주변은 시골길인 데다가 딱히 건물이나 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곳이기에, 카오루는 정류장에 사람이 있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누구지, 아는 사람인가?”

 

버스 배차 간격이 최소 두 시간은 되는 곳인데 여긴 어쩌다 오게 되었는지, 카오루는 묻고 싶었다. 조금 더 다가가 보니 키가 꽤 크고 체격도 저와 비슷했다.

 

‘레이 군이 생각나네…….’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레이를 생각하는 자신에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레이와 꽤 닮았다. 머릿결이 곱슬곱슬한 모양에 어깨까지 오는 길이이고, 체형이 어딜 봐도 날씬하게 마른 레이와 꼭 닮았다. 뭐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달리다시피 카오루는 그 사람을 향했다.

그림자를 머금고도 아주 진하게 비쳐 오는 노을빛이 맺혀진 그는 마치 인간 세계의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버스정류장에 기대어 비뚤게 서 있는 것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인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내가 지금 레이 군이 너무 보고 싶어 환각마저 보이는 걸까. 저 사람, 누구지?’

 

뛰고 또 뛰고, 가까워 보이지만 무척 먼 정류장과 자신의 거리를 좁혀 오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눈이 붉은 진홍색으로 번뜩 빛났다.

 

“레이 군! 레이 군이야?”

“…?”

“당신, 레이 군 맞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기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 보이겠다는 작정에, 너무 힘든 나머지 무거운 몸을 끌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이 카오루는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마침내 버스정류장 기둥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레이가 눈앞에 있었다.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니 레이가 특유의 햇살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카오루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지금 제 앞에 놓인 상황을 믿을 수 없는 카오루는 그저 말을 더듬으며 레이의 손을 더욱 꽉 쥘 뿐이었다.

 

“레, 레이, 레이 군,”

“진정하게나, 카오루 군.”

“다, 당신이 어떻게 여, 여기 있어? 헛것이야? 신기루야?”

“아니, 전부 아니라네. 자네의 애인이 맞네.”

 

거짓말 같았다. 레이는 분명히 죽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 다시 오게 된 걸까.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카오루는 눈앞의 레이를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레이 군, 레이….”

“카오루 군이, 그토록 찾는 레이가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으, 레이 군, 흐윽…….”

 

분명 아까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눈물에는 끝이 없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끌어안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레이의 품에서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레이 특유의 달콤한 향과 둘이 함께 사용하는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이 풍겨 오는 것이, 꼭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레이가 살아 있던 때, 하루하루 꿈만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던 때.

 

“레이 군, 가지 마…….”

“미안해, 카오루 군. 알다시피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네……. 너랑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란 반나절밖에는 없어, 해가 뜨면 난 가야 해.”

“싫어, 제발……. 나도 같이 죽으면 안 될까? 제발, 이렇게 사는 건 싫어. 더는 살고 싶지 않아……. 당신이 없는 삶은 지옥이야, 내 기억 속에는 온통 당신과의 추억이 무한재생돼서 미쳐 버릴 것 같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어쩌면 그 환한 얼굴이 이렇게까지 어두워졌을까. 레이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단단하고 긍정적이던 카오루의 무너지는 모습에 가슴이 산산조각이 났다.

 

“미안해.”

“레이 군이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이렇게 한심하게나 살고 있어서…….”

“넌 한심하지 않아, 내가 죽지 않았어야 했는데……. 나도 그리워서, 네가 보고 싶어서 정말 차원을 넘을 수 있는 시간이 오길 간절히 바랐는데. 막상 만나니까 더 아파…….”

 

두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언제나 하나가 울면 상대가 달래 주었건만, 레이의 부재로 쌓인 상처는 서로를 만나며 걷잡을 수 없이 쓰라려만 갔다.

웬만해서는 제 기분도 잘 못 표현하던 레이가 우는 모습은 목이 막히도록 안쓰러웠던 나머지 카오루는 레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레이가 얼굴을 파묻은 제 어깨가 점점 젖어 갔다.

그제야 카오루가 힐끗 본 레이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저와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커플링, 엄연히 말하면 약혼반지. 레이가 세상을 떠난 후로 화부가 이것도 태워버릴까요, 했던 반지는 보고만 있어도 레이와의 추억이 떠올라 아까움에 태우지 못하고 매일 바라보며 간직만 해야 했다. 그런 보기만 해도 아픈 반지가, 지금은 레이의 손에 예쁘게 끼워져 있다.

 

“조금만, 더 있을 수는 없는 걸까…….”

“아주 드물게, 현실 세계와 천계가 겹치는 날이 있는데, 그게 오늘이야. 이런 날이 다시 오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겠지…….”

“싫어어…. 레이 군, 제발 있어 줘…….”

“미안해….”

“미안하단 말이 어디 있어……. 응?”

 

결국 둘은 서로를 붙잡고 펑펑 울어버렸다. 찢어지는 마음을 애써 동여매고 있었던 밧줄을 끊어내듯이 마음속에 쌓인 것들을 댐 열듯이 흘려버렸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괴로웠다. 괴로움을 넘어, 차원을 거스르고 싶을 정도로. 인간은 생각보다 사랑 앞에서 모든 걸 잃을 정도로 어리석은 존재였고, 카오루와 레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두 사람의 찢어지도록 애끓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었던지라 감정들을 흘려보내니 오히려 편안해진 기분이 들었다. 한참의 설움이 그치고 카오루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가 카오루의 눈물을 손으로 살살 닦아 주었다. 눈물범벅인 레이의 얼굴 또한 카오루가 닦아 주었다. 레이의 얼굴은 죽기 전 건강할 때의 그 예쁜 모습이었지만 역시나 표정에 깃든 슬픔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카오루 군, 잘 지냈는고?”

“그 말투, 되게 오랜만이야. 듣고 싶었는데. 난 보다시피 잘 못 지냈어. 레이 군은?”

“본인도 같네.”

 

방금 울었던 주제에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웃는 모습이 안타깝도록 애틋했다. 카오루의 추억 속에만 있던 레이의 미소는 다시 봐도 밤하늘의 일등성보다도 훨씬 더 빛났다.

 

“있잖아, 카오루 군.”

“왜?”

“본인도 카오루 군을 많이 보고 싶지만……. 죽지 말게나.”

“왜 그렇게 내가 죽는 걸 말려….”

“인간의 이치란 주어진 명까지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서 이곳에 오면 본인도 기쁘지는 않을 거라네. 어쩌면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큰 죄를 짓는 거고.”

 

죽음은 반드시 잔해를 남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남아 있는 이들의 사랑. 어쩌면 죽음으로 인해 가장 힘든 것은 남은 이들이 고인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죽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고인과의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어쩌면, 자신과 같은 또 다른 슬픈 사람을 낳고 싶지 않아서.

 

“자네가 죽으면 코가 군과 아도니스 군, 그리고 자네의 가족분들과 친척분들이 모두 자네와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될 텐데, 그건 너무 어린 생각이지 않누.”

“으응…… 그렇지,”

“가장 큰 이유는, 자네를 사랑해서라네.”

 

직접적인 레이의 말에 동공이 살짝 커진 카오루를 잡고, 레이는 말을 이었다.

 

“본인은 자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기를 원한다네. 왜냐하면 자네는 많은 사람을 살게 해 주거든. 그래서 아이돌이라는 직업도, 계속 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던가.

대중뿐만 아니라, '남겨진 이' 들에게- 열정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주는 아이돌이 바로 하카제 카오루가 아니었던가. 그들을 살게 해 주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활력소가 아니었던가. 자네는 타인의 빛이고, 뮤즈라네. 자네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많지 않누. 그리고, 이 사쿠마 레이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하카제 카오루라는 존재를 사랑한다네…….”

 

할 말을 잃은 카오루가 고개를 숙였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이돌을 처음 시작했던 계기는 무엇이었던가.

 

‘나, 커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과 사랑을 전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래서, 아이돌이라는 직업도 한 거고. 레이 군이랑 같이. 물론 지금 레이 군이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도 같이 잃어버리는 거잖아……. 그런 걸 레이 군이 죽어서라도 좋아할까?

 

“….”

“자네를 사랑하네. 카오루 군, 그러니 살아 주게, 살아서 많은 사람을 자네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주게나. 그리고 그런 날이 오면, 본인을 한 번쯤 기억해 주어도 좋으이. 그러니 자유를 사랑하는 자네가, 꼭 본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요인에 얽매여, 자네를 잃게 두지 말라네.”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좋기는 하겠지. 그런데 어떡해, 레이 군이 자꾸만 생각나는 걸. 아직도 죄책감이 들고 피눈물이 나고 그래, 그날만 생각하면…….”

“쉬잇, 그런 건 이제 잊어버리게나. 아픈 기억을 되새길수록 자꾸만 부정적인 감정만 들곤 하니, 아주 잊지는 말되… 마음에 계속 담아둘 필요는 없네.”

 

카오루의 푸석해진 얼굴을 레이가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 따끈하면서도 어딘가 바람 냄새가 나는 손에 기대어 카오루가 울상을 했다. 애써 웃는 레이가 쓰라린 웃음을 지어 보이니 제 마음마저 쓰라려졌다.

 

“이제 울지 말게나. 카오루 군이 울면 본인도 슬퍼지니까.”

“응…….”

“그럼, 해가 뜨면 본인은 다시 가야 하니, 잊지 못할 추억이나 하나 남기는 것이 어떤고.”

“추억…?”

“그래, 추억.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데 의미 있는 날이면 좋지.”

“레이 군이 하고 싶은 건 있어?”

“카오루 군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좋네.”

 

레이랑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을지 열심히 고민하던 카오루는 이내 고민할 시간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가 뜨면 레이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레이를 그냥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레이 군, 내가 불꽃놀이 보여 줄까?”

“여기서?”

“응. 바닷가에서 쓰는 작은 폭죽으로 쏘아 올리면 돼. 실은 예전부터 레이 군이랑 불꽃놀이 보고 싶었는데, …….”

“좋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말끝을 흐리는 카오루를 레이는 토닥여 주었다. 바닷가에 그대로 앉은 레이에게, 바닷바람 때문에 추워 보였는지 카오루가 제 외투를 벗어 레이의 무릎에 올려 주었다.

 

이토록 환하게 웃는 당신의 미소를 몇 시간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말야,

그보다 행복할 일이 없을 텐데.

 

레이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카오루는 폭죽을 한 아름 사 들고 갔다. 머릿속에는 오직 레이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남겨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레이에게로 달리고 또 달렸다.

 

“다녀왔는고?”

“하아, 하아…….”

“왜 그렇게 서둘렀누, 얼굴이 빨개졌네…”

“사라져 버릴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잠시라도 눈을 떼면 당신이 나랑 함께 있다는 게 한낱 꿈이었을 것 같단 말이야. 당신이 너무도……. 떠날 사람 같아 보여서.”

 

카오루는 또 눈물이 나올 것같이 먹먹해져 가는 목소리를 끝으로 입을 꾹 다물고 깊은 가슴속으로부터 넘어오는 응어리를 삼켰다. 라이터를 켜 폭죽 꼬리에 불을 붙이는 표정이 침울했다. 누구보다 슬플 레이 군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아랫부분을 모래에 꽂아 고정한 후 카오루는 레이의 옆에 앉아 어느덧 새까매진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나 어릴 때……. 진짜 까마득히 어려서 기억도 안 나는 다섯 살에 우리 어머니와 함께 여기 왔었는데, 어머니가 긴 폭죽을 몇 개 사 오시더라. 그러면서 어린 내게 폭죽을 직접 쏘아 올려 주시면서 예쁜 불꽃을 보여 주셨었어. 그 추억만 떠올리면 힘들 때도 행복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기억이 다 가물가물한데 그 기억만은 잊히지 않아. 레이 군도 이 불꽃을 보면서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서…….”

“응, 그럴게. 눈물은 그만 그쳐. 카오루 군은, 웃는 쪽이 더 예쁘니까.”

 

레이가 카오루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다시금 무수한 울음을 삼키고는 레이를 바라보니 폭죽이 펑, 소리를 내며 터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수놓아지는 불꽃을 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제 눈에는 레이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레이를 보는 것은 하여금 슬픔과 애잔함, 그리고 사랑 같은 것들이 뒤섞여 뜻 모를 감정이 들게 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너무나도 그립고 마음이 쓰린 사람. 사랑을 형상화한다면 완벽한 예시가 되는 사람, 레이가 좋았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이를 어떡할까. 당신과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그런 카오루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레이가 한창 터지고 있는 불꽃에서 눈을 떼고 카오루의 눈을 바라보았다.

 

“카오루 군,”

“응. 레이 군.”

“우리의 이별은, 정해지지 않았어. 기억 속에서 다시 보면 되고, 꿈에서 만나면 돼.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우리의 결말은, 영원히 나지 않을 테니까.”

“꿈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매번 꿈에 나와야 해…….”

“그건 곤란한데. 그러면 또 카오루 군의 삶을 옛 추억으로 뒤덮어 버리는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가끔은, 그렇게 꿈에서 만나자.”

“당신이 나오는 꿈이라면 수천 번도 더 꿀 텐데.”

 

카오루가 레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레이의 몸은 저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항상 따뜻해서, 함께 있으면 자신의 마음처럼 레이의 마음도 설레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눈앞에서 터지는 불꽃놀이가 그렇게 레이를 닮아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끝내는 작은 밤하늘의 먼지가 되어 세상을 날아가는 것이 참으로 레이를 닮았다.

 

펑, 퍼엉…….

어린 꽃봉오리가 상처를 터뜨리듯이 터진 불꽃들이 하늘에 선명히 새겨졌다. 카오루에게는 그렇게 슬픈 불꽃놀이가 다시 없었다. 남은 화약이 아래로 떨구어지는 모습이 마치 눈물 같아 보였다.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에 터지는 폭죽이 비쳐 보였다. 카오루에게는 그것이 훨씬 아름다웠기에, 결국 불꽃놀이가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도 레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하늘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옆의 카오루를 바라보자 저를 한껏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주 안아주자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가 아직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 미소가 저 없이도 오래 가길 바랐다.

 

“레이 군, 사실 이 불꽃놀이…. 당신이 온전하게 살아 있을 때 하고 싶었어.”

“응? 왜…?”

“사실, 여기가 나에게는 참 의미 있는 장소라 여기서 당신한테 청혼하고 싶었거든. 그 어떤 것도 다 평등하게 사랑하는 당신이 나만은 조금 더 특별하게 여긴다는 걸 증표로 남기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어. 물론 그 후에 당신이 불치병 판정을 받고는 접었던 생각이지만……. 있잖아, 지금이라도 말해도 될까.”

 

카오루의 뒷말을 예상한 레이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평소와 같은- 그렇지만 조금 떨리는 어조로, 카오루가 말했다.

 

“레이 군, 나랑 결혼해 줘.”

 

그 어떤 이벤트도 없고, 멋진 분위기도 없고, 그 흔한 꽃다발 하나에 반지 하나 없는 소박한 프러포즈였지만, 레이에게는 그보다 더 의미 있고 행복할 프러포즈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곧 레이가 입을 열어 카오루처럼 조용하게 흘러가는 어조로 답했다.

 

“응, 좋아.”

“어차피 결혼식, 못 할 텐데. 꿈에서라도 성대하게 올리고 맹세의 키스나 먼저 할래?”

“응…….”

 

레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달콤한 맛이 제 입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생경함과 머릿속이 아찔하게 어질해지는 느낌이 아무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냥 카오루라서 그런지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좀 더…. 좀 더 닿고 싶어. 조금만 더… 하는 생각만 반복하고, 욕심을 비집고 들어온 더 큰 감정은 얽히고설켜 달큰한 맛을 자아낸다. 이 순간 세상에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고, 욕망, 사랑, 애정 같은 것들의 원초적인 감정들이 전부 녹아든다. 다시는 잊을 수 없게 감미로운 그 맛을 온몸으로 느끼며 더욱더 돌아올 수 없는 애정의 늪으로 빠져든다.

수줍게 단물을 빨아들여 숨이 차도록 나눈 끝 사랑이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미 불꽃놀이는 그친 지 오래였다. 서로에게 홀딱 젖은 두 사람만이 마음을 확인하느라 터지는 불꽃도 망각했을 뿐이었다.

 

“레이 군, 아직도 키스하면 얼굴 빨개지는구나. 아하하, 귀여워….”

“알고 있으니까……. 다시 언급하지 말라고…….”

 

레이가 얼굴을 더욱 빨갛게 물들였다. 그런 자신의 애인, 아니, 이제는 반려인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 카오루가 말했다.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재즈 댄스 출까?”

“어떻게 하는지 알아?”

“레이 군이 가르쳐줬으니 당연하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야, 다 기억한다고. 아무 노래나 불러주지 않을래?”

 

마주 보고 두 손을 잡은 자세로 시작하여, 레이가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곧 그곳은 둘만의 최고의 무도회장이자 둘만의 최고의 춤을 추는 무대였다. 가볍게 리드하는 레이의 춤에 기대어 카오루가 웃음을 지었고, 레이는 그 웃음에 화답하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노래했다.

 

“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춰

정해진 이별 따위는 없어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

Forever young Forever we young

이런 악몽이라면 영영 깨지 않을게 (Eight - 아이유) ”

 

노래하는 레이의 웃음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환이 느껴졌다. 잔잔히 흘러가는 레이의 춤 선에 어울리며 카오루 또한 춤을 추었다. 가사가 왠지 자신과 레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여명이 스며 오기 시작했다. 까맣던 하늘이 첫새벽으로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뜨는 해를 매어 두고 싶다는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이 세상이 영원히 밤이라면 레이를 계속 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결국 아침은 온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우리는, 춤추고 노래해야지. 우리가 함께 아이돌이었던 때처럼, 기쁨을, 사랑을 전하듯이.

이 춤을, 당신의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던 눈빛을, 나에게 지어 주는- 또 하늘에서도 지어 줄 든든한 미소를 기억하며 당신의 못다 한 꿈을, 희망을 이뤄 주고 싶어. 당신이 그립더라도, 당신은 내 추억 속에는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 내 마음속에도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을 영영 사랑하고 싶어.”

“나도, 널 언제나 사랑하고 싶어.”

 

지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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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해 주신 설영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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