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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rca de

내리는 가랑비에
​옷깃 젖는지도 모르고

Essay by. 피츠 님 (@F1TZ_C4T)

세부 페이지(13) 이미지

3월의 대학교 풍경은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 이제 막 입학해 새로운 캠퍼스 생활로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신입생하며, 봄바람 나부끼는 따스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 닭살 돋는 커플들. 그리고 마치 그들을 위한 배경이라도 되어 주려는 듯 외로운 카오루의 마음도 모르고 나뭇가지의 끝에는 녹지 않은 겨울의 잔해가 소복히 쌓여 있다. 이제 새내기라고 불릴 나이는 한참이나 지나 갔고, 위로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은 암울한 사 학년. 싱그러움은커녕 수많은 과제로 인해 어깨가 축축 무너지는 사 학년. 하아아. 카오루는 길게 숨을 내쉬며 묵직한 가방을 힘겹게 어깨에 걸쳐 맨다.

 

도대체 어느 미친 교수가 첫날부터 이렇게 강의를 한단 말인가. 개강 첫날, 그리고 강의도 첫날. 작년까지는 비교적 가벼웠던 첫날이, 이제는 교수마저도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는지 약 3개월 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종강 전의 텐션을 그대로 이어받아 평소처럼 강의를 진행했다. 책을 나눠 주기 무섭게 대략 30p 분량의 진도를 나가니, 긴 휴식기를 거치고 온 헌내기의 입장으로는 머리에 우겨 넣기보다는 이제는 그저 듣고 흘릴 일뿐인 것들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스크린 위로 쏘아지는 선명한 빔을 바라보며 '와, 좋은 거 쓰시네.'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만 불쑥 들었다. 팔랑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 마이크 너머로 낮게 울려퍼지는 교수의 목소리. 이 강의실의 모든 소리가 앙상블을 이루어 자장가처럼 들렸다.

 

"자, 여기 화면을 보면......."

 

교수가 막대를 들어 빔스크린을 팍팍 쳤다. 빔스크린이 충격에 작게 펄럭이자 화면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다시 제 화면을 되찾았다. 카오루는 그런 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는지 교재 위로 얼굴을 콕 박고 작게 숨소리를 낸다. 시간은 어느덧 한 시간을 지나, 두 시간, 그리고 강의의 막바지 세 시간까지 달려가자 개강 첫날 첫 강의부터 풀강을 듣게 된 학생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못 들은 척하기도 민망했는지, 교수가 몇 번 눈동자를 굴리더니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교재를 턱 덮었다.

 

"2주 차 과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강의는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같은 말을 기대했건만, 떠들썩한 분위기에 졸린 눈을 힘겹게 뜬 카오루가 턱을 괴고 느릿하게 하품했다. 교수는 분명 오늘이 개강 첫날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이제 다들 아는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조별 과제로 진행할 텐데, 조는 미리 짜 두었으니 앞에 놓여진 계획서와 함께 편성된 조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미친 교수가 첫날에 세 시간을 강의를 하고 조별 과제를 내 주냔 말이야. 이 생각은 카오루 자신만 한 게 아니었는지, 반발심 섞인 항의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교수님 너무해요~' 따위의 앙탈 정도였는데, 어울리지 않는 사각형의 무테 안경을 치켜올린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교재를 자신의 옆구리에 끼웠다.

 

"이상이고, 식사 맛있게들 하세요."

 

이 교수는 매년 이랬지. 괜히 똥고집 교수라는 별명이 있는 게 아니다. 교수가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앞에 놓여진 종이를 하나둘 챙기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더욱 관심이 쏠린 것이, 바로 조 편성 결과였다. 이미 아는 얼굴들이라고 해도 조는 맞는 놈과 맞지 않는 놈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데 막무가내로 짜서 주면 어쩌자는 건지. 카오루가 또 한 번 한숨을 푹 쉬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다가갔다.

 

"어, 하카제 선배!"

"안녕, 마이 쨩~ 내 조 좀 확인해 줄래?"

 

사람 좋은 웃음을 생글생글 짓자 후배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는 계획서와 함께 사진으로 찍은 조 편성표를 얼굴 앞에 내밀었다.

 

[C조: 사쿠마 레이, 하카제 카오루, 신도 마이, 코다 치히로.]

다행히 아는 이름은 둘이나 있었다. 치히로와 마이는 종종 교양이 자주 겹치던 후배였다. 그런데 '사쿠마 레이'라는 이름은 한창 발 넓게 놀던 작년에도, 복학 이전에도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전과생인가? 카오루가 고갯짓을 하며 화면을 응시하자 덩달아 마이의 고개도 기울어진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응, 응? 아니~ 여기 사쿠마 레이라는 사람, 누군지 알아?"

 

검지로 이름 다섯 자를 가르키자 마이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올해 복학하신 선배님이신데요, 지병 때문에 좀 오래 휴학하셨대요. 선배보다도 한참 선배라는 것 같던데요?"

"아하하, 그럼 완전 화석이네?"

 

어떤 지병이길래 내가 재학하는 중에도 못 봤지. 그럼 지금 이 강의실에 있다는 건데. 카오루가 강의실을 크게 둘러보았지만, 초면인 얼굴은 없었다.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거나? 하고 앞에 몰려 있는 학부생의 얼굴들도 한 번씩 바라보았지만 레이라는 이름이 들리지도, 그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 그 선배님은 오늘 안 나오셨어요!"

 

마치 카오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마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놀란 듯 바라보던 카오루는 마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사람 좋게 싱긋 웃었다.

 

"응, 그런 것 같네. 그럼 조별 회의 할 때 보자, 마이 쨩~"

"네! 제가 단톡방 파 둘게요!"

 

이래서 후배를 잘 둬야 한다니까. 무임승차를 만나서 조별 과제로 폭망하는 일은 없겠다. 그 후배 두 명은 꽤 성실한 편이었고, 학점도 꼬박꼬박 잘 챙겼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만 따라 준다면 학점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다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강의 첫날부터 보기 좋게 결석하신 그 복학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카오루는 강의실에서 나와 가방에 든 전공책들을 개인 캐비닛에 우겨 넣었다. 어깨를 축축 늘어트리던 그 무게감은 보다 홀가분해졌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먼저 향한 곳은 학생 식당이었다. 논스톱 3시간 강의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능숙하게 식권을 끊고, 주문한 부타동을 받아 앉자 새삼 사 학년이라는 게 확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떠들썩하게 굴던 친한 동기들은 졸업 또는 휴학한 상태였고, 그렇다고 후배들을 꼬드겨 밥 한 끼 먹자 하고 제안하자니 불편한 화석 선배로 이미지가 남을 것 같았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부터가 화석 확정이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쓴 마음을 뒤로 하고, 나무 젓가락을 툭 분리했다. 나무 젓가락이 뚜둑 소리를 내며 끄트머리가 깔끔하게 분리되지 못하고 언밸런스하게 나눠지고 말았다. 오늘 정말 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왼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무의미하게 SNS 스크롤을 내리며 오른손으로는 말없이 부타동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썩 맛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그냥 사거리에 있는 카페 가서 팬케이크나 먹을 걸 그랬나.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고, 반 이상이나 남은 부타동을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기분으로 혼자 먹어 봤자 크게 전환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꾸역꾸역 밀어 넣은 점심은 결국 소화되지 못하고 체하고 말았다.

 

 

 

맛을 음미하기보다 그저 위를 채우기 위해 섭취한 음식이 위에서 뭉쳐져 꾹 누르는 것 같았다. 속까지 더부룩한 마당에 파랗던 하늘은 먹구름이 먹먹하게 껴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방을 뒤적거려 봐도 우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내릴 것 같지도 않으니 최대한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필 이런 날에 또 코트를 입고, 또 이런 날에 캔버스를 신어서. 불만스럽게 카오루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흐릿했던 하늘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지더니 후두둑 물줄기로 금세 변한다. 비 피할 곳 없는 도로 한가운데 서 있던 카오루가 매고 있던 가방을 위로 올려 급하게 가려 보지만, 천으로 된 가방은 가리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우산을 구매하기 위한 편의점은 걸어서 대략 이십 분 거리 정도. 그렇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니 비가 그칠 때까지 멍하게 있기에는 시간 낭비일 것 같았다.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무작정 기다리고 있기도 애매했으니. 담벼락 너머로 길게 뻗어진 나무 아래에서 겨우 비를 피했지만, 완벽히 피하긴 어려운 모양이다. 굵어지는 빗줄기에 옷자락이 여과없이 젖어간다.

꿉꿉한 공기, 살갗에 달라붙는 젖은 옷자락,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까지. 컨버스도 쫄딱 젖어 이미 양말까지 축축한 상태다.

여기에 이러고 있으나, 가면서 맞으나 비슷할 것 같은데. 카오루가 침음하다 그냥 재빠르게 편의점까지 뛰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해 눈을 질끈 감고 발걸음을 뗐을 즈음. 쏴아아 쏟아지는 봄비에 쫄딱 젖어야 할 몸이 빗방울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이다.

 

"...아?"

 

의아함에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새카만 머리가 길게 내려온, 붉은 눈동자가 그 다른 것보다 선명한 사람이 카오루에게 우산을 기울여 주고 있었다. 벙찐 표정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당혹스러움만 가득한 카오루가 내딛었던 발걸음을 다시 뒤로 무르자, 자신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카오루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다.

 

"가는 데까지 씌워 주겠네."

 

사람 좋게 싱긋 웃은 남성의 호의에 카오루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렀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내딛어 그의 옆에 섰다. 키는 엇비슷해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 큰 성인 남성 두 명이서 쓰기에는 우산이 꽤 비좁은 건지, 빗방울이 계속해서 어깨 위로 툭툭 떨어졌다.

한참을 한마디 말 없이 걷고 있자니, 우산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흘긋 곁눈질로 바라보면 시선이 마주했고,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시선을 다시 제자리에 고정했다.

 

"저기... 앞에 편의점까지만 데려다 주면 되는데."

 

손을 뻗어 편의점을 가리키자 남자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루의 젖은 어깨가 신경 쓰였는지 좀 전보다 우산이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이 사람은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배려를 한담. 본인이 여성이라면 단순한 호의로 해 줄 수 있는 일이겠지만, 체격 비슷한 건장한 사내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빗소리만 감돌던 침묵이 이어지고, 편의점에 다다르자 카오루가 재빠르게 우산 아래에서 나와 편의점 앞에 선다.

 

"잠깐 우산 사 올 때까지 여기 있어 줄 수 있어?"

"그래, 다녀오게나."

 

카오루가 당부의 당부를 남긴 뒤 문을 열고 우산을 하나 집어든 뒤, 온장고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가격대가 제법 나가는 보틀 형태의 커피도 꺼낸다. 캔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함이 빗물의 냉기를 데워 주는 것 같았다. 계산을 끝마치고, 우산의 포장 비닐을 뜯어 쓰레기통에 버린 뒤 편의점에서 나오자 그 남자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하하, 별건 아니지만... 보답."

"응?"

 

마지막에 골랐던 보틀 형태의 따뜻한 커피를 남자의 손에 쥐여 준 카오루가 사람 좋게 웃었다. 자신의 캔커피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우산을 팡 펼친다.

 

"사람의 호의를 그냥 넘기는 사람은 아니거든. 받아둬~ 고마워서 주는 거야. 별거 아니니까, 정말."

 

그럼 잘 가. 카오루가 까딱 고갯짓을 하고 펼친 우산을 머리 위로 쓴 뒤 유유히 자신의 집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젖은 신발이 찝찝한지 여러 번 인상을 구기며 엉성하게 걷기도 했지만 남자는, 아니 레이는 쥐여진 커피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며 금빛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

"선배... 이거 드랍할까요?"

"안 돼, 이 교수님이 과제는 좀 이래도 점수는 좀 후하게 주셔~ 힘내자, 마이 쨩."

"과제를 이렇게 내니까 후하게 주는 거 아니에요?"

 

눈치 빠르기는. 카오루는 대답 없이 눈웃음만 짓다가 다시 시선을 노트북 화면으로 옮겼다. 조별 과제가 시작된 지 4일 차. 그 사쿠마 레이라는 복학생은 아직도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고, 라인도 전혀 읽지 않은 채 잠수 상태였다. 그래, 어쩐지 팀원 라인업이 괜찮다 했다. 평탄하게 흘러가면 조별 과제가 아니지. 조별 과제가 괜히 좆별 과제라고 불리겠는가. 카오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그 사쿠마 라는 사람은 오늘도 결석?"

"네에, 그런가 봐요. 오늘 강의에도 출석 안 하셨어요."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이름은 빼면 그만이고. 자료 조사야 후배들의 능력으로 충분하니까. 카오루는 바쁘게 키보드 위를 두드리다가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창밖 모습에 노트북 뚜껑을 텁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고, 진행도도 나쁘지 않아 기한 내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조에 비해 속도도 빠른 편이었으니 이 정도는 느슨하게 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치히로와 마이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녀들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더 늦으면 여자애들 귀갓길도 좋지 않을 테고. 카오루도 노트북의 충전선을 분리하고 가지런히 정리해 가방에 넣는다.

 

"끝난 겐고?"

 

한창 일사분란하게 짐을 챙기던 도중, 낯익은 목소리가 문쪽에서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며칠 전 우산을 씌워 준 남자였다. 상당히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붉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지? 그나저나 같은 학교 학생이었구나. 카오루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무어라 입을 떼려던 순간.

 

"어, 사쿠마 선배!"

 

치히로가 반가운 듯 화색했다.

 

"...사쿠마?"

 

치히로의 목소리에 놀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가, 다시 천천히 레이에게 옮겨진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 연락 두절에 강의에조차 출석하지 않아 드랍한 줄 알았던 무임승차가 이 사람? 카오루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레이를 응시했다. 레이는 그 시선과 마주하다 결국 눈길을 피해 버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치히로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마이와 치히로는 먼저 가겠다며 강의실 밖으로 나간다.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단둘만이 남아 카오루는 머쓱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이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 건 레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애써 웃음을 띄운 채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사쿠마 군? 과제하러 온 거지?"

 

아, 선배라고 해야 하나. 이미 다 틀은 짜여진 상태였고, 역할 분담도 끝난 마당에 뭘 쥐여 줘야 할지. 카오루가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다. 그러자 레이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으며 괜찮다 대답했다.

 

"그간 사정이 있어서 오지 못했으이. 남는 역할이 있으면 그거라도 주면 좋겠구먼."

 

말투부터 쩔쩔매는 모습까지. 왠지 학번이 10년 이상은 차이 날 것 같은 포스에 카오루가 아하하, 하고 웃음만 터트렸다. 사실 뭐라고 한마디 할 작정이었는데, 그 사정도 왠지 꼬치꼬치 캐묻기도 어려웠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 버릴 것 같은 예감.

역할은 뭐가 남더라. 피피티 제작은 카오루가 맡은 일이었고, 자료 조사와 발표는 모두 맡기로 한 부분이었다. 발표를 시켜도 되나? 학번도 얼추 비슷해 보이고, 다년 간의 대학 생활을 미루어 보아 대부분 복학생들은 발표에 여유가 있었다. 물론 모든 복학생들이 그랬다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사쿠마 군, 발표... 괜찮아?"

 

PPT 다 제작하면 메일로 보내 줄 테니까, 그걸로 대본 짜서.... 카오루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덧붙여서.

 

 

 

 

조별 과제 무임승차 건은 다행히 잘 풀려 PPT에 적어 넣었던 레이의 이름을 지울 수고는 덜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자 카오루의 휴대폰 알림이 두어 차례 울렸다. 지긋지긋하게 사라지지 않던 조별 과제 단체 라인의 1이 사라지고, 새카만 고양이가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을 보내는 레이가 사과와 함께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겼다. 진즉 먼저 확인한 치히로와 마이도 귀여운 토끼나 햄스터 따위의 스티커를 보내며 떠들썩하게 채팅방을 채웠고, 그걸 지켜보던 카오루도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흔드는 여우 스티커를 전송했다.

 

"스티커도 정말 자기 닮은 거 쓰네...."

 

카오루가 휴대폰 전원을 끄고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귀엽다기보다는 조금 살벌한 고양이 스티커였다. 눈이 죽 찢어진 스티커는 귀여움과는 멀었지만, 귀엽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니까, 사용하는 사람이.

 

 

... 응? 뭐라는 거야, 지금.

 

 

 

 

-

교수들은 다 지 강의만 듣는 줄 알지. 어떻게 된 게 내 주는 과제마다 욕지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거진 전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시간표 속에 황금 같은 교양 교수님마저도 기대를 저버리고 이상한 레포트 과제만 줄창 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이 상태고. 왜 선배들이 죽어가는 몰골로 학교에 나돌아다녔는지 알겠다. 개강 이후 2주 간은 단정한 코트와 함께 깔끔한 고학번 선배 이미지를 꽤나 잘 지키고 다녔는데, 점점 하루가 거듭될수록 놀라움만 가득한 과제의 양에 옷은 점점 추레해지고 차분하게 내렸던 병지도 아무 고무줄이나 주워 대충 묶어 버렸다.

조별 과제는 발표 순서도 정해진 상태였고, 우리 차례는 두 번째. 이미 수십 번의 과제로 인해 첫 발표로 떨리니, 어쩌니 할 때는 지났다만. 그동안 준비한 것을 미루어 보아 딱히 떨릴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레이가 준비한 대본은 그 어떤 대본보다 완벽했다. 듣는 학생과 교수가 불쾌하거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적당한 쿠션어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내용들.

 

'솔직하게 발표에서도 그 늙은이 말투를 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대본은 멀쩡했다. 화석 선배를 넘어 조상 선배 콘셉트라도 잡은 건가. 처음에는 어색해서 웃어 넘겼던 레이의 말들도 한두 번씩 맞장구쳐 주다 보니, 생각보다 그와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 코드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세심하게 신경 쓰는 다정함이 대화 곳곳 엿보였기 때문에.

화려한 그의 얼굴을 천천히 시선으로 훑었다. 깊은 아이홀과, 생각보다 날렵한 눈매 아래 붉은 눈동자. 집중하면 살짝 구겨지는 미간, 보통 사람들보다 새하얀 피부. 코를 따라 내려가면 즈려문 붉은 입술까지.

 

"하카제 군?"

"헉."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레이의 부름에 숨을 들이켰다. 갑작스럽게 들이켜진 숨에 결국 켈록켈록 기침을 하자 레이가 휴지를 툭 뜯어 건네 주었다.

 

"켁, 고마, 워, 케흑."

"본인이 보고 싶으면 그렇게 보지 말고 대놓고 봐도 되네만?"

"뭐... 뭐?!"

 

켁, 콜록, 콜록! 뭐라고 더 반박하지 못하고 연신 켁켁거렸다. 눈물까지 글썽 고여 구겨진 얼굴로 레이의 얼굴을 응시하자, 레이는 생글생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마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이. 그 얼굴이 묘하게 재수 없었는데, 그 얼굴보다 얇은 입술에 다시 한 번 시선이 갔다.

카오루는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레이를 한 번 흘기고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두었다. 귀끝이 계속 홧홧했다. 마치 그 불과 같은 새빨간 눈빛에 데인 것처럼 화끈화끈, 화끈화끈.

 

 

 

 

"이상, C조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평소 쓰지 않던 사각테의 안경을 쓰고 온 레이가 교수 앞에 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학생들의 박수 갈채가 쏟아져 나오고, 교수도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시작에서 삐걱거리던 조별 과제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이 과제를 제외하고 다른 강의의 과제는 태산만큼 남아 있긴 했지만, 이 과제가 가장 점수 반영이 컸다. 의욕 넘치는 후배 둘 덕에 자료 조사는 풍족했고, 덕분에 카오루만 새벽 늦게까지 퀭한 눈으로 PPT를 매만져야 했다.

피곤하면 어때, 잠을 못 자면 어때! 이걸로 A는 확정이니 그걸로 됐다. 졸업이 일 년도 남지 않은 입장으로는 그 학점 하나가 소중했다. 더군다나 작년에는 술 마시며 놀겠다고 날린 학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그건 계절학기로 채우면 되는 거고....

발표는 완벽했다. 말을 더듬거나, 내용에 비해 발표가 부실했다면 역량이 확 드러났을 터인데 오히려 피피티에 없는 내용까지 손수 보충해가며 열과 성을 다해 발표를 했다. 개념 없는 무임 승차 복학생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생각했던 게 미안해질 만큼.

 

"으~ 지겹던 조별 과제 끝! 선배들 덕에 진짜 버스 제대로 탔어요!"

"다 후배님이 힘내 준 덕이지. 본인은 정리해서 얘기한 것밖에 없으이."

"에이, 너무 겸손하시네. 저희 별건 아니고, 오늘 금요일이고 하니까 술 마실까요, 술?"

 

체력도 좋다. 분명 과제의 양은 4학년과 엇비슷할 텐데, 마이는 퀭한 기색 없이 눈을 빛냈다. 덩달아 치히로도 그러자며 동조했다. 예쁜 후배 두 명이서 사슴 같은 눈망울로 그렇게 원한다면 들어 주지 않을 선배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 급한 과제도 없었지, 아마.

 

"학교 근처 이자카야 맞지?"

"네, 지금 바로 가요?"

"얘 좀 봐! 치히로, 지금 세 시야!"

 

우와, 엄청 주당인가 본데. 마이가 치히로의 등을 찰싹 때리며 그녀를 만류했다. 결국 약속 시간은 여섯 시로 정해졌다. 그러자고 대답했으면 정말로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부을 작정이었는지, 치히로의 얼굴에 아쉬움이 역력했다. 미안하지만 스물다섯의 선배님은 낮부터 달릴 체력이 없어서 말이야. 과제 하나 끝내겠다고 마신 카페인 함량이 높은 에너지 음료 하나만 마셔도 죽어가는 게 카오루였다. 세 시부터 밤까지 술을 들이부을 생각을 하니 섬찍할 정도로 아찔했다.

 

 

집으로 돌아온 카오루는 부스스 묶었던 꽁지 머리부터 풀었다. 묶였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머리는 영 단정치 못했다. 일단 씻고 나가야겠지. 보통 후배들이 복학생들이랑 술을 먹고 싶어 하던가?

... 이런 부분 하나하나 러브 시그널로 받아들일 나이는 이미 지났다. 카오루는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옷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 손잡이를 위로 올렸다.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쏟아지자 나른함에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물기에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적당한 두께감의 니트와 함께 갈색 롱코트를 걸쳤다. 동기들이 있을 때도 네가 신입생이냐며 몇 번 타박을 들었었지. 괜한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라이로 머리까지 단정하게 매만진 뒤에 몰려오는 현타에 한참이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 사람이 좀 고팠나? 고작 후배들이랑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꾸밀 필요 있어? 이미 건든 머리 한쪽만 내버려두기는 우습다고 생각해 다시 빗과 드라이를 쥐어 들었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부끄러운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아서니까.

... 정말, 정말로.

 

 

십 분 일찍 도착한 이자카야에서는 이미 마이와 치히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쥐고 있는 걸 보아하니 메뉴를 고르는데 열중한 듯했다. 카오루가 생글 웃으며 테이블을 똑똑 노크하듯 두드렸다.

 

"아, 오셨어요? 선배는 맥주? 하이볼?"

"정말이지... 오자마자 술부터 묻는 거야? 나는 하이볼. "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고, 마이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빈 옆자리를 물끄러미 보다 시선을 거두며 물 한 모금을 넘겼다.

주문한 메뉴는 모듬 꼬치와 오코노미야키. 살 테니 마음껏 시키라고 더 얘기를 해도 두 명의 후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더 시키는 건 술밖에 없다며 으름장까지 덧붙여서. 요즘 애들은 무섭다니까. 알았다며 겨우 진정시킨 뒤에야 뒤늦게 들어온 레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쿠마 군, 여기!"

 

금요일 저녁의 대학가 근처 이자카야는 이 시간대면 사람이 늘 붐볐다. 이런 곳에 자주 오는 편이 아닌 건지, 가게 중앙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꼴이 꼭 길 잃은 고양이 같았다. 손을 들어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레이가 웃으며 카오루 옆에 의자를 빼내어 앉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봤구먼.... 음식은 시켰는고?"

"네. 선배 술도 하이볼로 시켰는데, 하이볼 괜찮으세요?"

 

치히로가 메뉴판을 레이에게 밀어 주며 다른 것도 있다며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그 모습이 꼭 할아버지 알려 주는 손녀 같아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니,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은데 할아버지는 좀 너무했나. 웃음소리 덕에 시선이 전부 일제히 카오루에게 쏠렸다. 민망함에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명하자 후배들은 고갯짓을 하다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만 다른 한 명은 여전히 시선이 카오루에게 향해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맹렬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카오루는 관자놀이가 뚫릴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 있나? 비웃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을 몇 모금 넘기고 그 시선과 마주하며 '왜?' 하고 묻자 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냥."

"그냥?"

 

뭐야, 실없게. 카오루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한창 교수 뒷담화로 꽃을 피우던 중, 주문했던 음식 두 접시와 하이볼 네 잔이 이어 나왔다.

 

"첫 잔인데 건배는 해야죠! 건배사 뭐 할까요?"

"졸업을 위하여?"

"야, 야아...... 갑자기 축 처지게 왜 이래."

 

치히로의 의견에 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졸업은 당연히 할 거고,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한창 두 명이 건배사로 궁시렁거리는 동안 카오루가 아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서 무작정 유리잔과 맞부딪히며 '자~ 그냥 짠하자. 짠~' 하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킨다. 후배들은 벙쪄 있다가 와하학 하고 호탕하게 웃더니 그게 뭐예요~ 하며 덩달아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근데요, 사쿠마 선배는 왜 휴학하신 거예요?"

 

와, 이 후배 생각보다 엄청 직설적이네. 지병 때문에 휴학했다 정도로만 모두가 알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늘 궁금증이 있긴 했었다. 카오루도 마시던 하이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서비스로 나온 과자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음, 개인적인 사정일세."

 

말해 주기 어렵다 이건가. 지병이라고 했으니 막 얘기할 문제도 아니긴 했다. 그냥저냥 넘어가려는 차에 벌써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치히로가 잔을 쿵 내려 놓았다.

 

"선배가 사실 엄청난 금수저 재벌 2세라서 후계자 수업 때문에 휴학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진짜예요?"

"푸웁, 켁."

 

이건 또 무슨 얘기야? 무슨 그런 삼류 로맨스 남자 주인공 설정 같은 소문이 다 있어? 얘기를 듣던 카오루는 결국 사레 들려 연신 켁켁댔다. 휴지를 뽑아 들고 기침을 하자 옆에 있던 레이가 등을 토닥였다. 그런 소문의 주인공... 같은 얼굴이긴 하다만. 그게 진짜라면 학교를 다닐 필요가 있나?

 

"재미있는 소문이구먼. 후배님이 보기에도 그래 보이는고?"

 

레이는 크크크, 하고 여유롭게 웃으며 등을 토닥이던 손을 거두었다. 취기 올라 붉어진 얼굴의 치히로는 한참이나 레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파하,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선배는 완전 할아버지 같아요, 영감탱......."

 

그러고는 쿵, 헤롱헤롱한 얼굴로 테이블 위로 얼굴을 처박더니 그대로 새근새근 잠들어 버린다. 그녀의 옆에 하이볼 잔들이 즐비해 있었다. 마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슬슬 파하는 게 좋겠다고 짐을 하나둘 챙기기 시작했다. 카오루는 조금 아쉬웠다. 그녀들이 아쉽기보다, 이 자리가. 아직 비우지 못한 하이볼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다 마셔 버리고는 후배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학번끼리 얘기 좀 나누다 갈 테니까 조심히 들어가, 마이 쨩."

 

평소 같았으면 여자애들 단둘이서 위험하다며 데려다 주겠다고 아우성이었겠지만, 오늘따라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후배들도 그걸 바라지 않을 테고, 괜히 개수작 부리는 선배로 찍히는 것도 이쪽에서는 사양이었으니. 마이는 어깨에 치히로 팔을 두르고 꾸벅 인사하며 밖을 나갔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이자카야 분위기 속, 나란히 앉은 두 남성의 어색한 침묵. 어색한 건 카오루뿐이었는지, 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종업원을 불러 하이볼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사쿠마 군, 술 좀 해?"

 

카오루가 도발하듯 미소 지으며 얘기했다. 빈 잔은 테이블 구석으로 치우고 오코노미야키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레이는 그런 카오루를 가만히 바라보다 덩달아 미소 짓고 금세 나온 하이볼 잔을 들어 카오루 쪽으로 내밀었다.

 

"하카제 군보다는 잘할 것 같네만."

 

당돌한 레이의 대답에 카오루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들어 맞부딪혔다.

지금 이거 해 보자는 거지?

 

 

 

 

-

머리가 찡했다. 깨질 듯이 찌르르 아픈 머리에 카오루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을 위로 잡아 올렸다. 머리 위로 올라와야 할 이불이 뭐에 눌린 듯이 팽팽했다. 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꼼지락꼼지락 몸을 내려 이불 안으로 몸을 숨겼다. 몇 번을 바르작거리다 발끝에 채인 낯선 감촉에 감았던 눈을 번뜩 떴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침대를 좀 좁게 쓴 기분이 들기도 하고.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짚고 몸을 일으키자 큰 덩치를 구겨 옆에 누워 있는 레이가 보였다.

 

"...응?"

 

뭐야, 이 사람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 자기 집은 어쩌고. 주위를 둘러 보니 현관부터 침대까지 막무가내로 벗어둔 옷이 길을 따라 놓여져 있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젖어 있는 상태였나 보다.

어제 후배들을 그렇게 보내고 단둘이서... 몇 잔을 마셨더라. 누가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필름이 깨끗하게 끊겨 있다. 아무리 상기해내려고 머리를 붙잡고 있어도 지끈거리는 두통만 선명해질 뿐, 기억력에 도움이 되질 못했다. 다 좋은데, 왜 단둘이 헐벗고 한 침대에 누워 있냐는 말이야. 대충 이불로 몸을 감싸고 일어나 물부터 한 잔 들이켰다. 속옷 차림으로 불편하게 큰 덩치를 구기고 있는 꼴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일단 여기는 우리 집이고....

 

"저기, 사쿠마 군."

 

일단 깨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집에 있는 상황도 저쪽도 크게 달가울 일은 아닐 테니, 깨워서 돌려보는 게 맞겠지. 몸을 잡고 흔들자 미간이 구겨지더니 단정하게 감겼던 눈이 천천히 떠진다. 긴 속눈썹이 떨어져 볼에 안착한다. 카오루가 손을 뻗어 볼 위에 떨어진 속눈썹을 떼어 주자, 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우리 같이 왔어?"

"......으음."

 

레이는 대답 없이 앓는 소리를 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을 움츠리며 '추워....' 하고 말을 덧붙인다. 이거 대놓고 이불 달란 소리 맞지? 카오루가 한숨을 푹 쉬더니 몸에 둘렀던 이불을 다시 레이 위로 덮어 주었다. 아직 봄의 쌀쌀한 한기가 훅 스치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옷장 안에 있는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냉장고를 열었다. 있는 거라곤 계란 두 알 정도. 장을 보겠다, 보겠다 하고 미룬 게 여기서 드러나다니. 몇 개 남지 않은 인스턴트 미소시루를 꺼내어 뜨거운 물에 개어낸다. 계란프라이 두 장, 그리고 즉석밥도 두 개. 대충 쓰린 속에 채워 넣을 정도로만 가볍게 차린 뒤 다시 레이를 불렀다. 레이는 이불 안에서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카오루 앞에 마주 앉아 하품을 길게 했다.

 

"아하하, 집에 뭐가 없어서.... 이 정도라도 괜찮지?"

 

머쓱하게 뒷목을 문지르며 웃자 레이는 짧게 고맙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식기구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뿐, 멍한 표정으로 레이는 말없이 밥만 푹푹 떠먹었다. 그런 모습을 곁눈질하며 먹는둥 마는둥 하는 카오루가 신경 쓰였는지, 레이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두고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신다.

 

"어제 일은 전혀 기억이 안 나는고?"

"으응, 응?"

 

밥을 입으로 가져가던 카오루가 화들짝 놀라며 레이를 응시했다. 왠지 아쉬움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곤, 흰 나신을 이불로 둘둘 말고 있는 꼴은 아침 햇살 쏟아져 내리는 공간에서 마주하기 퍽 낯부끄러웠지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치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가슴이 콕콕 찔려 따가웠다. 카오루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그을쎄...? 하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사쿠마 군이 아니라 레이 군이라고 불러 주기로 한 것도 잊은 모양이구먼, 카오루 군."

"에? 우리 요비스테 하기로 했어?"

"카오루 군이 먼저 제안했네만?"

 

레이는 다시 숟가락을 들어 남은 밥을 싹 비우고는 빈그릇을 개수대에 가지런히 놓았다. 설거지는 자기가 하고 갈 테니 다 먹고 개수대에 놓기만 하라는 말까지 덧붙여선, 다시금 침대 위로 몸을 내던진다.

 

 

다시 생각해 보자. 도발로 시작된 내기로 오기가 생겨 주량을 한껏 넘긴 것까진 기억이 난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동기들끼리 마셨던 술자리나 MT, 심지어 환영회에서도 남의 술 말아 주고 챙기는 입장이었지, 먼저 꼴아 버리는 포지션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쿠마 레이가 술고래에 술 괴물이라는 뜻이겠지. 마신 양도 비슷할 터인데 술자리가 끝나고 계산할 때까지 낯짝 멀쩡했던 게 이제서야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계산하고 건물 밖을 나왔을 때는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었고, 우산이 없던 카오루는 올라오는 술 기운에 우산을 사거나 쓸 생각도 없이 빗속을 걸었었다. 그리고 쫄딱 젖은 행색으로 또 자신과 비슷한 새카만 우산을 사 와 씌워 주던 사쿠마 레이.

 

"아하하, 사쿠마 군은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비 오는 날에만 나랑 단둘이 있네."

 

취기로 인해 붉어진 얼굴로 휘청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레이는 그런 카오루를 단단히 붙잡고 웃는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이도 완전히 멀쩡한 정신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 챙길 정도는 됐다. 다만 한 손으론 우산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성인 남성 하나 붙잡기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마당에, 완전히 몸을 맡겨 축 늘어진 사람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빗물에 젖은 몸이 축축하다.

거리 한복판에서 이러고 서 있기도 민망한 모습이 연출되어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레이가 카오루를 골목 어귀로 잡아 끌었다. 둘 다 쫄딱 젖어 우산이 더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여기서 더 젖는 것보단 낫다는 판단이었다. 벽에 기댄 레이가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카오루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쿠마 군... 사쿠마 군."

"응?"

 

조금 정신을 차렸나. 레이가 떨어지는 빗방울에 젖는지도 모른 채 우산을 카오루 쪽으로 기울였다. 양뺨 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새빨개져선, 헤실대는 꼴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카오루는 몇 번이고 레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속이 안 좋다며 주르륵 주저앉았다. 젖은 소매에 얼굴까지 폭 파묻고 연신 앓는 소리를 낸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가 마주 쪼그려 앉아 우산을 씌워 주면, 카오루는 발간 얼굴을 들어 붉은 시선과 마주한다.

 

"레이 군이라고 불러도 돼?"

 

술에 취해 어눌한 발음으로 천천히 질문을 내던진다. 눈꼬리를 한껏 휘어 배시시 웃는 붉은 얼굴은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예뻐 보였기에, 레이는 한참이나 그 얼굴을 응시하다가 마주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찬 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금요일의 대학가는 화려하고 소란스러웠지만, 새카만 우산 아래의 두 사람의 공간은 마치 공간이 분리된 듯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둘은 미동 없이 서로의 시선만 마주한 채 조용히 호흡했다.

 

우산이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져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대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듯하더니 어느 구간에서 멈춰선다. 입술에 닿는 감촉이 무엇인지 자각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말간 얼굴, 꾹 감긴 눈. 입맞춤이라기에는 다소 투박했지만 맞닿은 입술은 그 무엇보다 뜨거웠다. 빗물에 젖어 시린 손이 뺨에 닿는다. 입술부터 퍼진 열감은 멈출 줄을 모르고 뺨을 타고 점차 마음까지 붉게 물들인다. 레이는 놀란 듯 동그랗게 떴던 눈을 천천히 내리 감고 입술을 벌렸다. 내뱉는 숨결마다 알코올이 진하게 번진다.

귀를 간질이던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퍼즐 조각처럼 흩어졌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둘 모여 장면을 만들어 낸다. 먼저 입술 부딪힌 주제에 모르는 척 뻔뻔하게 까고 있는 것도 웃기겠지. 오히려 거절하거나 밀치기는커녕 오히려 응하며 키스한 쪽은 저쪽이고. 카오루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들던 숟가락마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비가 온다는 것 같던데."

 

그렇게 한참 입을 열지 못하고 조용히 먹던 테이블을 정리하던 중,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오루는 응? 하고 고개를 돌려 레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제 카오루 군을 데리고 오느라 우산을 좀 잃어버려서 말일세."

"엣, 진짜?"

 

레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카오루를 응시했다가 시선이 마주하자 눈꼬리 휘어 샐쭉 웃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얄궂었다.

 

"오늘은 카오루 군이 데려다주면 좋겠구먼."

 

그리고 옷도. 레이가 말을 덧붙이며 몸에 두른 이불을 팔락였다. 벌어진 이불 틈으로 드러난 나신에 카오루가 민망한 듯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붉어진 귀끝을 감추지 못하고 주춤주춤 방으로 들어가 여분의 옷을 꺼내 레이에게 건넸다. 옷을 건네받은 레이는 몸에 둘렀던 이불을 내리고 소매에 팔을 끼우려던 때, 집요한 열띤 시선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귀는 터질 듯이 붉게 물들인 주제에 눈빛은 욕망에 솔직하다. 고작 상반신만 드러냈을 뿐인데 마치 전라를 드러낸 것처럼 온몸이 화끈했다. 레이는 고개를 들어 카오루를 올려다보곤 얄궂게 미소지었다.

 

"언제까지 볼 생각인고?"

 

카오루 군은 변태. 팔을 엑스자로 만들어 가슴팍을 가리자 그제서야 아차, 하며 몸을 홱 돌린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투덜거렸지만, 옆태로 보이는 달아오른 뺨을 레이는 놓치지 않았다.

 

"다, 다 갈아입으면 얘기해."

 

분주한 척 겉옷을 챙겨 입고 여전히 이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못한 채 샛노란 우산을 챙겨든다. 창밖으로는 마치 어제의 연장선처럼, 세찬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벌써 한 학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기말고사와 쌓여가는 수많은 과제에 지친 후배는 이미 책상 위로 얼굴을 콕 박은 채 교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 후배와 딱히 다른 상황은 아니었기에 카오루는 웃으며 대충 동조했다. 차라리 연일로 연달아 빠르게 시험 쳐 버리고 끝냈으면 좋겠는데. 벚꽃 만개하던 봄은 지난 지 오래고, 뜨거운 여름볕이 작열하는 7월. 종강을 일주일 앞두고 아직 두툼하게 쌓인 교재만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같은 구간을 읽기를 반복한 지 어느덧 30분째.

사쿠마 레이와는 그 뒤로 관계가 크게 진전되진 않았으나, 스쳐지나가면 한 번씩 어깨를 툭 만져 주었다. 응원의 의미인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어깨만 가볍게 툭툭 쳐 주고 같이 밥 한 끼는 고사하고, 가벼운 인사 하나도 건네질 않았다.

 

그때 좋다고 덩달아 같이 키스에 응한 주제에.

스스로가 한 건 입맞춤보단 우스꽝스러운 박치기에 가까웠지만, 먼저 입 벌려 키스한 쪽은 레이였다. 그쪽에서 먼저 '키스를 당했다.' 라고 주장해도 부딪히기만 했지 실상 당한 쪽은 카오루였으니, 오히려 반대로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알코올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그러다 홧김에? 어떤 이유든, 이 애매모호하고 신경 쓰이는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기에는 카오루의 마음이 복잡했다.

 

"하카제 선배, 진짜 계절학기 들으실 거예요?"

"음... 뭐, 내키지는 않지만 졸업은 해야 하니까?"

"졸업하지 마세요...."

"우왓, 그거 졸업생 입장에서 들으면 되게 섬뜩한 말인 건 알지?"

 

후배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며 다시 한 번 책상 위로 엎어진다. 선배가 없으면 이 과에 눈요기할 놈이 없다구요. 한숨까지 푹푹 쉬며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까지 했다. 카오루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게~ 내가 없으면 이 학과 간판이 없어질 텐데. 알면 졸업 보류 좀 해 보세요. 마이 쨩, 나 진짜 소름 돋았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거뭇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우르르 쾅쾅하며 천둥 소리를 내고 차가운 물줄기를 쏟아내릴 것만 같았다. 우산을 챙겨 왔던가. 요 며칠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사람 하나 말려 죽일 날씨더니, 장마 전조였던 모양이다. 카오루는 펜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집 가기 전에는 안 내리겠지, 하고 안일한 생각을 하며 펼쳐진 교재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하늘이 번쩍거리며 뒤이어 세상이 무너질 듯이 큰 굉음을 내며 치는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들고 있던 펜까지 툭 떨어트리고는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바로 쏴아아 하고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다.

 

'사계절 내내 여분 우산을 챙기고 다녀야 하나....'

 

어떻게 우산을 안 가져오는 날에만 비가 내릴 수가 있는지. 이것도 징크스라면 징크스일까. 이런 소란인 와중에도 후배는 팔자 좋게 교재 페이지를 흠뻑 적시며 숙면했다. 부럽다, 팔자 좋아서.

 

비가 오던 날이면 늘 마주치던 사람이 불현듯 떠오른다. 늘 새카만 우산을 들고 다니던 그 사람. 술김에 쌍방으로 입 맞추고 남의 집에서 잠까지 잔 주제에 데면데면하게 구는 사람. 어깨를 만질 때마다 닿은 곳이 불에 데인 것처럼 한참이나 화끈거려 그곳을 만지작거리는 건 분명 모를 테지. 카오루가 가라앉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선배, 우산 가져오셨어요?"

 

어느새 잠에서 깬 마이가 눈을 부비적거리며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켰다. 침자국이 선명한 교재를 보고 머쓱하게 웃더니 주섬주섬 책을 정리해 가방에 넣기 시작한다.

 

"으음~ 아니, 근처에서 살까 하고. 마이 쨩은?"

"이따 치히로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요! 그리고 지금 더 공부해 봤자 집중도 안 될 것 같고...."

"엄청 잘 자던데?"

"...윽, 선배도 얼른 들어가세요. 금방 그칠 비도 아니니까요."

 

으응, 그래야지. 벌써 짐을 다 챙긴 마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 마이는 재빠르게 과실을 벗어났다. 카오루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문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응시하고, 응시했으나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느릿한 몸짓으로 책상 위로 즐비한 여러 책들을 정리해 가방에 넣고는 앉은 자리를 가지런히 정돈 후에 과실을 천천히 나섰다.

 

 

여름 장마철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실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밖으로 느껴지는 습함이란 몹시 불쾌했다. 이런 비는 잠깐 뛰어간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비도 아닐 텐데. 어디 버려진 우산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느린 발걸음으로 1층 현관까지 내려가니 세찬 빗줄기가 더욱 선명했다. 빗줄기가 떨어지는 바닥에서 튄 물방울이 컨버스를 적신다. 카오루는 그 풍경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카오루 군."

 

왜 이런 타이밍에만 나타나는지. 왜 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쓰고 자신 앞에 나타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지. 평소와 같은 새카만 우산이 아닌, 카오루가 들고 다니던 샛노란 우산을 든 레이가 카오루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천 위로 세찬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소란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런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꽤 그리웠던 얼굴에 심장이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쿵 곤두박질 쳤음에도, 그 쿵쾅거림은 빗소리에 묻혀 먹먹하기만 했다.

 

"...레이 군."

"응."

 

카오루가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 음의 떨림이 빗소리에 묻히길 바랐다. 카오루는 평소 레이가 자신에게 하듯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천천히 감싸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시린 뺨을 부드럽게 감싸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봄비 내리던 그날, 투박하게 부딪혔던 입맞춤은 온데간데 없고 조심스레 맞닿은 입술은 작열하듯 쏟아지는 여름의 태양볕처럼 뜨거웠다. 봄부터 천천히 달아오른 마음을 대변하듯 입맞춤의 시작은 조심스러웠으나, 삼켜지는 입술은 열기에 달아오른다. 레이는 눈을 지그시 감아 그저 우산을 카오루 쪽으로 기울인 채 고개를 틀어 입맞춤에 응했다.

 

봄비처럼 가볍게 젖기 시작한 사랑이 세찬 장마처럼 하릴없이 무너져 젖어든다. 준비성이라곤 없는 나는 쏟아지는 비를 피할 재간이 없어 앞으로 쭉 젖어갈 테고, 나는 마를 새 없이 영영 당신에게 젖어든 채 살아가겠지.

 

카오루가 눈을 지그시 감아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품에 꽉 안기는 그 몸이 좋았다. 숨 막힐 듯한 습한 공기와, 입술 새로 섞이는 더운 숨마저 그대로 질식해도 좋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 아마 이 장마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카오루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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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해 주신 피츠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2022 by FITZ / assisted by 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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